자비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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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비 마립간은 458년부터 479년까지 신라의 왕이었다. 왜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을 방어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펼쳤다.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실패했고, 이후 명활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47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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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마립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칭호 | 마립간 |
재위 기간 | 458년–479년 |
즉위 | 458년 |
이전 통치자 | 눌지 마립간 |
다음 통치자 | 소지 마립간 |
아버지 | 눌지 마립간 |
어머니 | 아로 왕후 |
사망 | 479년 |
사망 장소 | 신라 |
추존왕호 | 자비 마립간 (慈悲麻立干) |
개인 정보 | |
이름 | 김자비(金慈悲) |
출생 | 미상 (410년대경) |
사망 날짜 (양력) | 479년 3월 12일 |
사망 장소 | 서라벌 명활성 |
형제자매 | 조생부인 |
배우자 | 미사흔(未斯欣)의 딸 김씨, 복호의 딸 김씨 |
자녀 | 소지 마립간 |
능묘 (추정) | 황남대총 |
신라 통치 | |
시대 | 신라 |
20대 마립간 | 신라 마립간 |
2. 가계
눌지 마립간과 실성 이사금의 딸 아로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2] 왕후는 미사흔의 딸이며,[1][2] 아들로는 소지 마립간이 있다.[1][2]
2. 1. 부모
2. 2. 배우자 및 자녀
3. 치세
자비 마립간의 재위 기간은 왜인의 잦은 침입과 고구려, 말갈의 북쪽 국경 침공 등 대외적인 위협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왜의 침입에 대비한 성곽을 쌓고, 북쪽 변경인 실직 지역 방어를 위해 무엇(현재 강릉시) 주민을 동원하여 니하(남대천)[3] 연안에 성을 쌓았다. 또한 서북쪽 방면으로는 470년 삼년산성(보은군)[4]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 중앙부로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 개로왕의 구원 요청(나제동맹)에 따라 군대를 보냈으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수도 한성(현재의 서울특별시)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고구려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수도 내의 명활성(경주시 보문동)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5] 국가 방위에 힘썼다.
재위 22년째인 479년 2월 3일에 사망하였으며,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3. 1. 왜와의 관계
잦은 왜인과의 전투가 있었으며,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여 여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3. 2. 고구려 및 북방 민족과의 관계
고구려와 말갈로부터 북부 변경 지역인 실직에 침입을 받았다.[3] 이에 무엇(현재의 강릉시) 주민을 동원하여 니하(남대천) 연안에 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다.[3] 또한 470년에는 서북 방면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삼년산성(보은군)을 쌓았으며,[4] 이 성은 이후 신라가 한반도 중앙부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백제 개로왕은 나제동맹에 따라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자비 마립간은 군대를 보냈으나, 신라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백제의 수도 한성(현재의 서울특별시)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 사건으로 큰 위협을 느낀 자비 마립간은 이후 수도 내의 명활성(경주시 보문동)으로 거처를 옮겼다.[5]
3. 3. 백제와의 관계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개로왕은 나제동맹에 의거하여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자비 마립간은 이에 응하여 원군을 보냈지만, 신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은 고구려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개로왕 역시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큰 위협을 느낀 자비 마립간은 이후 거처를 명활성(경주시)으로 옮겼다.[5]4. 사망
재위 22년 만인 479년 2월 3일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참조
[1]
뉴스
Silla's Geomungo Master Baek Gyeol
https://world.kbs.co[...]
KBS World
2010-09-24
[2]
웹사이트
"이사지왕(尒斯智王), 신라 왕 맞지만 금관총 주인 아니다"
https://www.chosun.c[...]
2020-07-26
[3]
문서
泥河は、5世紀以前は江原道の南大川、6世紀以降は咸鏡南道の深浦川を指すものと考えられている。
[4]
문서
三年山城というのは築城から落成までに三年を要したことによる名であり、別名では烏頂山城。報恩郡の現地には遺構がある。多く例の見られる天智紀山城ではなく、高さ6メートル余りの城壁をもつ中国風の城壁を持つ特殊な山城であり、新羅による半島統一の後も、示威的に利用されたという。
[5]
문서
『三国史記』高句麗本紀・百済本紀では蓋鹵王戦死については475年9月条に記しているが、新羅本紀では同じ内容を474年7月条に記し、それに続けて475年正月条に明活城へ居城を移したことを記している。記年のずれはあるが、百済王の敗死を聞いての移居と見られる。
[6]
기타
조카 지증왕과 조생부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학계에서는 자비 마립간이 최소 410년대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kiss.k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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